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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고민 : 부민고소법의 딜레마
  • 황남기 기자
  • 등록 2025-05-22 09:12:17
  • 수정 2025-05-22 09: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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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의 고민 : 부민고소법의 딜레마



헌법재판소는 평등원칙을 이렇게 이해한다.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바 여기서 사회적 신분이란 사회에서 장기간 점하는 지위로서 일정한 사회적 평가를 수반하는 것을 의미한다(헌재 1995. 2. 23. 93헌바43).”

 

 

세종 4년  1422년  2월 3일

 

형조에서 계하기를,

 

신 등이 살펴보건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주인을 고발한 자는 그 고발을 받지 말고, 무고율에 의거하여 교형에 처할 것이며, 여자 종의 남편과 남자 종의 아내가 주인을 고발한 자는 그 고발을 받지 말고 장(杖) 1백, 유(流) 3천 리의 형벌에 처할 것입니다. 또 부사(府史)·서도(胥徒)가 관리(官吏)와 품관(品官)을 고발하고, 이민(吏民)이 감사와 수령을 고발한 자는 이를 받아 다스려서, 그 고발한 것이 거짓인가 참인가를 안 후에, 위에 있는 사람은 논죄하지 않고, 고발한 자만 죄를 더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종사에 관계되는 일과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 일이 아니면 이를 받지 말고 장 1백, 유 3천 리의 형벌에 처할 것입니다."

 

 유정현·박은·이원 등이 이를 심히 그르게 여기며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면 수령이 더욱 꺼림이 없게 되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허조는 아뢰기를,

 

"수령의 하는 짓은 많은 사람의 이목(耳目)에 드러나 있으니, 비록 이민(吏民)들로 하여금 이를 말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어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일찍이 태상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늙었사오니 만약 윤허(允許)를 얻게 된다면, 신은 죽더라도 눈을 감겠습니다."

 

라고 하며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태상왕이 그 말에 감동하여 즉시 그대로 따랐다.

 

 

 

일반백성이 수령을 고발을 금지하고 고발시 오히려 고발한 백성을 처벌한다는 허조의 주장을 태상왕인 태종이 수용하였다. 이를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또는 수령고소금지법(守令告訴禁止法)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에 지방의 향리나 일반 백성들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하던 제도이다.  살인 같은 중범죄와 역모에 대한 고발은 가능했다.

 

 

 

세종 1년(1419년) 6월 21일 에도 허조가 부민고소금지법을 건의하자 세종은 "내가 다시 보려고 하니 잠시 그대로 두라. 이미 이루어진 법을 마음대로 함부로 고칠 수 없는 때문이다."

하니, 여러 의논이 분분하여 한결같지 않으나, 다만 이수(李隨)가 혼자 말하기를,"새로 고치는 것이 불가하니, 만일 부락민이 탐관 오리의 잘못을 고하여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방자한 행동이 기탄이 없어서 그 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하였다.

 

즉 세종도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 흔쾌히 수락하지 않았고 이수의 말처럼  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되면 탐관오리의 잘못을 하소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것은 당연할 일이어서 쉽게 수락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종을 허조가 설득하여 시행되었다.

 

세종은 여러 차례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한 불만을 이어갔으나 폐지하지는 않았다.

“억울하고 원통한 정을 펴 주지 않는 것이 어찌 정치하는 도리가 되겠는가(세종 13년 1월 19일)”

”고금 천하에 어찌 약소한 백성은 원억(冤抑)함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경의 뜻은 좋지만, 정사로서 실시하기에는 정당하지 않다(세종 15년 10월 23일 )."

 

하여간 세종대에 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수령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한 것이니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 제11조 제1항에 위반된다.

역사적 사실이나 법령을 판단할 때 항상 문제되는 것이 현행헌법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당시 법령에 따라야 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대립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유신헌법 일부 조항과 긴급조치 등이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하였다는 반성에 따른 헌법 개정사, 국민의 기본권의 강화ㆍ확대라는 헌법의 역사성, 헌법재판소의 헌법해석은 헌법이 내포하고 있는 특정한 가치를 탐색ㆍ확인하고 이를 규범적으로 관철하는 작업인 점에 비추어, 헌법재판소가 행하는 구체적 규범통제의 심사기준은 원칙적으로 헌법재판을 할 당시에 규범적 효력을 가지는 현행헌법이다(2013. 3. 21. 2010헌바132, ).”라 한다. 헌법재판소 판례 논리에 따르면 부민고소금지법의 정당하냐를 현행 헌법 제11조 제1항을 기준으로 하면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헌법재판은 향후 해당 법령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를 기준으로 하므로 현행 헌법을 재판규범으로 한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 행정소송에서 행정처분의 위법 여부는 행정처분이 행하여졌을 때의 법령과 사실 상태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여야 하고, 처분 후 법령의 개폐나 사실상태의 변동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는 않으므로, 난민 인정 거부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취소소송에서도 그 거부처분을 한 후 국적국의 정치적 상황이 변화하였다고 하여 처분의 적법 여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이러한 대법원 판례 논리에 의하면 처분시 또는 행위시 법령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므로  세종대의 사회적 상황, 신분제도를 기초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해 많은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  왕권의 강화,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지방관 파견을 확대했는데, 토착 호족들의 텃세가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의 뜻을 받들어 호족들의 횡포, 지주들의 패악질을 개혁하려는 지방관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토호세력들에게는 이런 지방관들은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지방관들이 내려와 토호세력과 백성간의 비합리적인 고질적인 병폐를 개혁하려고 해도  토착 호족 세력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고발토록 하여 지방관을 파면시키는 행태들이 많았을 것이다

 고려시대 때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향리를 점차 지방관서의 행정 사역인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려 했을 것이다.  지방관은 왕권의 대행자로서 그 권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되었다.

지방 토호세력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부민고소금지법이 필요했을 것이고 지방관의 횡포를 막기 이해서는 부민고소법을 폐지해야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종도 오락가락하면서 반대하면서도 내치지도 못하고 그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각종 감찰관을 각 도에 수시로 특파하여 지방의 탐학과 비행을 적발하려하였다.

 

세종대의 백성들은 토호세력과 지방관 모두에게 수탈당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누구의 수탈과횡포가 백성들에게 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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